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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끗한 백신’을 얻기 위해 의사들이 한 일

#엄마 손을 잡고 흙먼지 날리는 큰길로 접어든 흑인 아이는 두려움에 눈물을 흘렸다. 나무 아래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노예 모자의 소유주와 의사였다. 소년이 도착하기 무섭게 의사는 아이의 팔뚝을 날카로운 칼로 찔러 상처를 내고는 준비해온 천연두 ‘딱지’를 피가 나는 아이의 살갗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염 안된 아이의 몸을 이용해 다량의 ‘깨끗한 백신’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미국 남북전쟁 기간 속절없이 천연두가 번져가자 남군의 의사들은 사람의 몸을 이용해 백신을 체취하는 퇴행적인 방법을 썼다. 영유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예 아이의 온 몸엔 평생 갈 흉터와 패인 자국이 남았지만 의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권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발굴해온 짐 다운스 게티스버그 칼리지 역사학 교수는 ‘제국주의와 전염병’(황소자리)에서 의학적 발견의 화려한 역사 뒤에 묻히고 삭제된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국주의 시대 흑인과 혼혈인, 노예와 식민지인, 죄수와 군인들이다. 의학은 이들의 사례와 연구를 통해 비약적 발전이 이뤄지게 된다. 이들은 권력에 의해 속박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저자는 특히 1756~1866년 사이에 주목한다. 국제 노예무역과 제국주의 팽창, 전쟁으로 큰 인구 이동이 이뤄진 시기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의학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의사들은 질병의 원인과 확산, 예방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현대 역학은 이때 시작됐다.

책은 1756년 영국 군인들이 수용 인원 초과 상태인 인도 감옥에서 죽어간 이야기로 시작한다. 벵골군에 포로로 잡힌 영국군들이 과밀 수용 감옥에서 무더기로 죽어간 것이다. 극도의 갈증과 호흡 곤란이 이유였다. ‘캘커타의 블랙홀’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의 위험성을 알렸다. 노예선 브룩스의 배 밑바닥에 쇠사슬에 묶여 짐짝처럼 부려진 노예들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지켜본 군의관 출신 트로터는 신선한 공기와 과일을 공급, ‘상품으로서의 노예’를 지켜냈다. 트로터는 이후 ‘괴혈병 전문가’가 된다.

저자는 크림전쟁 중 현장을 누비며 전염병이 군에서 민간으로 확산되는 이유를 밝히는 등 역학의 기초를 다진 나이팅게일, 노예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남북전쟁에서 오히려 인종차별적 분류체계로 오늘날까지 질병을 인종 단위로 파악하는 악습을 만든 북부 의사들의 모순적 행동, 19세기 중반 전 세계에 퍼진 콜레라 대유행 까지 의학이 사회· 역사적 변화 속에서 발전해온 특수한 과정을 탐색한다. 그동안 학계에서 독립적으로 다뤄온 노예제, 식민주의, 플랜테이션, 전쟁을 의학전문가의 관점에서 아울러냄으로써 영향 관계를 밝힌 점이 새롭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제국주의와 전염병/짐 다운스 지음, 고현석 옮김/황소자리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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